[칼럼 - 정완 교수] 세상에 호상(好喪)은 없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종합행정실 댓글 0건 조회 17회 작성일 26-08-10 10:39본문
<세상에 호상(好喪)은 없다>
부모님이 아흔을 넘겨 큰 병치레 없이 평온하게 생을 마감했을 때, 장례식장을 찾은 조문객들은 흔히 ‘호상이셨습니다’라고 말하며 상주의 손을 잡는다. 오래 사셨으니 고생은 덜하셨고, 편안히 떠나셨으니 다행이라는 뜻을 담은 위로다.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우리의 장례문화 속에서 이 말에는 분명 선의가 담겨 있다.
그러나 선의가 언제나 위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부모를 떠나보낸 자식에게 그 말은 때로 “이제 그만 슬퍼해도 된다”는 무언의 권고처럼 들리기도 한다. 아흔이라는 나이가 부모와의 이별을 가볍게 만들지는 못한다. 천수를 누린 삶에 대한 감사와 부모를 잃은 슬픔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오래 사신 부모를 보내면서도 자식은 세상에서 가장 큰 상실을 경험할 수 있다. 죽음 앞에서 슬픔의 깊이는 나이가 아니라 관계가 결정한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죽음을 지나치게 쉽게 분류하는 사회가 되었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 ‘안타까운 죽음’이고, 오래 살다 떠나면 ‘호상’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한다. 물론 이러한 표현은 애도의 혼란 속에서 서로를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회적 언어일 것이다.
하지만 그 언어가 어느 순간 죽음의 의미를 규정하고 슬픔의 크기까지 평가하는 기준으로 작동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어떤 죽음은 충분히 슬퍼해도 되고, 어떤 죽음은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암묵적 기준이 생기는 순간, 애도는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사회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표현되는 감정이 된다.
현대 한국의 장례문화 역시 이러한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대부분의 장례는 짧은 기간 안에 치러진다. 유족은 깊은 슬픔을 마주할 시간도 없이 장례 절차를 준비하고, 조문객을 맞이하며, 각종 실무를 처리해야 한다. 많은 장례식장이 전문화되면서 과거보다 유족의 부담은 줄었지만, 여전히 상주는 추모보다 접객에 더 많은 시간을 쓰는 경우가 적지 않다. 슬픔은 잠시 뒤로 미뤄지고, 장례는 정해진 절차를 차질없이 마무리해야 하는 일정처럼 흘러간다.
그 과정에서 ‘호상이니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라는 말은 의도와 무관하게 상주에게 감정을 절제하라는 신호로 전달될 수도 있다. 물론 대부분의 조문객은 슬픔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에서 그런 말을 건넨다. 문제는 선의의 표현이 상대방의 감정을 대신 규정하는 순간이다. 위로는 슬픔을 줄여 주는 말이 아니라 슬픔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해외의 장례문화도 하나의 참고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일부 유럽 국가에서는 사망 후 장례까지 비교적 여유있는 시간을 두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시간 동안 가족과 가까운 지인들이 함께 고인을 추억하고 삶을 돌아보는데 더 많은 비중을 두기도 한다.
물론 국가와 종교, 지역에 따라 장례 방식은 매우 다양하며 어느 한 문화가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장례를 단순히 신속히 마쳐야 하는 절차가 아니라 충분한 애도의 과정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우리에게도 의미있는 시사점을 준다.
이제 우리 사회도 장례문화를 조금씩 바꿔 갈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장례의 목적을 접객보다 추모에 두는 문화가 확산되어야 한다. 가족장과 소규모 장례를 원하는 유족이 사회적 부담 없이 선택할 수 있어야 하며, 장례식 이후에도 추모 모임이나 기일을 통해 고인을 기억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질 필요가 있다.
부조 역시 의례적 상호부조를 넘어 고인을 기리는 편지나 추모 기부 등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특정 형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유족이 자신의 방식으로 애도할 권리를 존중하는 일이다.
무엇보다 바뀌어야 할 것은 우리의 언어다. 상실을 겪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죽음을 평가하는 말이 아니라 슬픔을 인정하는 말이다. “많이 힘드시겠습니다”, “얼마나 그리우시겠습니까”, “곁에 있겠습니다”라는 한마디는 때로 어떤 위로보다 깊은 공감을 전한다. 애도는 상대의 감정을 정리해 주는 일이 아니라 그 감정이 흘러갈 시간을 함께 견뎌주는 일이다.
부모를 잃은 자식에게 ‘호상’이라는 말은 반드시 위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은 오래 사신 부모를 부정해서가 아니라 아무리 긴 세월을 함께했더라도 이별은 여전히 아프기 때문이다. 죽음에는 좋은 죽음과 나쁜 죽음을 쉽게 나눌 수 있는 기준이 없고, 슬픔에는 정답도 표준도 없다.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성숙한 애도 문화를 지향한다면, 이제는 죽음을 평가하는 언어보다 상실을 존중하는 언어를 배워야 한다. 부모의 죽음 앞에서 중요한 것은 ‘호상’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깊이 기억하고 남겨진 이의 슬픔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우리의 자세일 것이다.
출처 : https://www.lawlead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19663
관련링크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