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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정형근 교수님-100만원도 적은 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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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종합행정실 댓글 0건 조회 1,742회 작성일 21-02-01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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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근 교수 에세이 (28)] 100만원도 적은 돈이 아니다[정형근 교수 에세이 (28)] 100만원도 적은 돈이 아니다 기사 관련이미지

민사 사건을 해결한 뒤 큰 액수의 성공보수를 받은 정형근 교수. 퇴근길에 볼리비아에 있는 친구에게 돈을 보내주려던 그가 교회 앞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서초동에서 개업한 지 5~6개월이 지날 무렵 법률사무소에 변화가 생겼다. 함께 사무실을 쓰던 선배 변호사님이 새로 설립되는 법무법인의 구성원 변호사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무실을 폐쇄하고 신설되는 법무법인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사용하던 사무실은 공간이 너무 커서 나 혼자 사용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나에게 적합한 사무소를 마련해야 했다. 이미 동료들은 단독 개업을 하거나 고용변호사로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나 혼자 뒤늦게 개업지를 찾아야 해서 난감했다. 여기저기 수소문을 내고 다녔더니, 사건수임은 자신들이 책임을 지겠다는 사람들이 접근하기도 했다. 나는 평생 법조인으로 준법을 실천하면서 살아가야 하는데 불법의 세계에 발을 담글 수는 없었다.


내 사정을 전해 들은 동기 변호사가 영등포구 문래동 근처에 비어 있는 법률사무소가 있다고 소개해 주었다. 그 무렵 시행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구청장으로 당선된 변호사님이 자신의 법률사무소를 인수할 변호사를 찾는다고 했다. 사무직원도 그대로 있어 변호사만 들어가면 되는 곳이었다. 그래서 구청장실을 방문하여 인사를 드리고 그분의 사무실을 인수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종이에 사무실 양도양수 계약서를 쓰려고 하였다. 그런데 막상 너무나 막연하고 시시콜콜한 사항을 적어야 해 매우 어색했다. 몇 분도 되지 않아서 "우리끼리 이런 거 적을 필요가 뭐 있겠냐!"면서 그만두었다. 우리는 서로 민망해서 웃었다. 서면에 의한 법률행위 중요성을 잘 아는 변호사들끼리도 막상 그렇게 하려니 자연스럽지 않았다. 평소 의뢰인들에게는 종이에 명확하게 써두었어야 한다고 강조해 왔으면서도 막상 그런 일에 직면하니까 말처럼 되지 않았다.


그렇게 문래동에서 변호사업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아주 낡은 건물 2층에 위치한 사무소였다. 건물 근처에는 중국음식점이 있어서 짜장면 냄새가 늘 풍겼다. 복도의 전등 불빛도 밝지 않아 어두컴컴하고 칙칙한 분위기였다. 그런 허름한 환경이었지만 법률상담을 오는 낯선 분들이 많았다. 아주 편하게 문을 열고 들어와서 상담하고 사건을 맡기고 갔다. 그렇게 수임한 사건이 매달 서너 건씩 되었다. 나는 낡은 건물에 사무소가 위치하여 내심 맘에 안 들었지만, 의뢰인들은 그걸 문제 삼지 않고 자기 사건을 성실하게 잘 처리해 줄 변호사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항상 승소하여 결과가 좋은 사건만 맡을 수는 없었다. 상담할 때는 어찌해야 하나 막막해도 도전해보는 것이 필요했다. 모두들 어렵게 지내던 시절에 사업에 성공하여 여유롭게 지내왔던 연세 드신 분이 찾아왔다. 훤칠한 이마에 정갈하게 빗어넘긴 흰머리를 하신 의뢰인은 나를 깍듯이 대해주었다. 알 수 없는 권위와 품위 때문에 나는 그분을 회장님으로 호칭했다. 그분은 1970년대 후반에 육군 대령으로 재직 중인 친구에게 돈 100만원을 주어 경기도 여주에 있는 땅을 사두도록 했다. 나중에 나이 들면, 그 땅을 팔아서 두 사람의 노후자금으로 사용하자고 했다. 육군 장교였던 그 친구는 앞으로 전망이 좋아질 것으로 예상되는 여주 지역의 여러 필지 땅을 구입하여 자신의 이름으로 등기를 마쳤다. 그리고 의뢰인에게는 구입한 땅 번지와 면적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80세가 되었을 무렵, 의뢰인은 장교로 복무했던 친구에게 그 땅들을 팔자고 제안을 하였다. 그러자 그 친구는 무슨 땅 이야기를 하느냐고 펄쩍 뛰었다. 언제 땅 살 돈을 줬다는 말이냐고 반문하였다. 친구의 뜻밖의 태도에 실망한 의뢰인은 땅 번지의 부동산 등기부를 확인하게 되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땅은 그 친구의 아들이나 며느리 또는 제3자에게 소유권이 넘어가 버린 상태였다.


의뢰인은 그 친구가 땅을 횡령하였다는 혐의로 서울동부지청(현재 서울동부지검)에 고소를 하였다. 고소사건은 모두 횡령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무혐의로 나왔다. 그런 상태에서 나를 찾아온 것이다. 의뢰인은 민사소송으로 자신의 땅을 찾아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땅들을 찾는 소송을 하기로 수임약정을 체결했다. 증거가 없는 상태이고 고소한 것도 무혐의 결정이 난 상태라서 승소하기 쉽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분도 마지막 수단으로 재판해 보는 것이니까 최선만 다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착수금은 아주 적게 받고, 성공보수는 듬뿍 약정하였다.

그리고 "피고는 경기도 여주에 있는 여러 필지의 땅 중에서 2분의 1을 원고(의뢰인)에게 이전하라"는 내용의 민사 소장을 제출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재판이 열렸고, 재판장은 증거를 내라고 하였다. 일단 검찰에서 무혐의 결정이 난 수사기록을 확인해 보아야 한다면서 그 기록의 송부촉탁신청을 했다. 그리고 다른 증거를 모색하고자 의뢰인과 자주 만났다. 그분은 사무실에 올 때는 반드시 점심을 함께하기를 원했다. 평소 의뢰인과는 식사를 하지 않던 나는 그분의 제안만큼은 거절할 수 없었다. 의뢰인과 점심이나 저녁을 함께하면, 식사 시간 내내 사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그래서 가능하면 식사 시간만큼은 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지만 연세 드신 분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 함께 식당에 가면, 그분은 늘 따끈한 정종을 시켜 함께 마시기를 권했다. 투박한 도자기 컵에 뜨거운 술이 찰랑찰랑 넘칠 정도로 가득 담긴 것을 마셔야 했다. 80세 연세가 무색할 정도로 건강하고 풍류도 넘치는 분이었다.


"세상에 안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니, 정 변호사님이 최선을 다해 주면 된다."


늘 이렇게 말씀했다. 나를 신뢰하고 편하게 대해주니, 어떡해서라도 좋은 소식을 전해드리고 싶었다.

재판도 없고 한가하였던 어느 날 오후에 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피고를 대리하는 변호사님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그 변호사님과 평소 알고 지내던 사이도 아니었고, 나보다 경력도 11년이나 많은 법조계 선배였다(사법연수원 13기). 법정 밖에서는 처음으로 대화를 하는 순간이었다. 그 변호사님은 평소 민변 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여주 땅 사건 정형근 변호사입니다. 제가 청구한 그 민사재판은 증거가 없어서 애로가 많네요."


그러자 그 변호사님도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하였다.


"그렇죠. 무슨 30년 전에 땅값을 줬다고, 지금 와서 땅을 내놓으라고 하면 되겠어요."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하고 전화를 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냥 즉흥적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비록 철없던 시절의 생각이기는 했지만, 법과대학을 입학할 때는 장차 정의를 실현하자는 생각을 막연하게 품었던 것 같습니다. 저나 변호사님 모두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 지금, 법대 들어가면서 가졌던 정의를 실현시켜야 할 사건이 바로 김 변호사님과 제가 대리하는 이 사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유치한 말 같았지만, 법과대학을 나와 변호사가 되어서 하는 일은 정의사회를 구현하는 그런 거대한 일이 아니라 내 의뢰인이 법의 보호를 받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상대방이 내 말을 들어주니 편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제 의뢰인도 연세가 80세인데, 거짓말로 이 소송을 하자고 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이 드신 두 분 사이를 옛날처럼 화목하게 만들어 줄 여지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두 분 사이를 화해시켜서 정의로운 결과를 만들어 주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그 변호사님은 당사자들을 화해시키자는 말에는 흔쾌히 동의해 주었다.


"두 분이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오셨는데, 지금 와서 재판까지 하는 것은 안타깝습니다. 피고도 그리 나쁜 분은 아닙니다. 독실한 천주교인이시고⋯."


그러면서 원고가 피고를 친구들에게 "땅 팔아먹은 나쁜 놈"이라고 욕하지 말 것을 부탁했다. 원고가 주변 사람들에게 하도 피고 욕을 하고 다녀서, 피고도 그 때문에 괴로워한다고 했다. 그리고 나의 제안을 피고 본인에게 잘 전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그 사건을 맡으면서 한 번도 이런 식의 해결방안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너무 막막하니까 불현듯 피고를 대리하는 변호사에게 하소연이나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그 후 여러 차례 전화가 오갔고, 지루한 시간이 지나갔다. 나는 갈수록 조급해지는데, 상대방은 급할 게 없었다. 거의 매번 "생각해 보겠다"는 응답을 하였다.


여러 날이 지난 후에 상대방은 부동산 모든 필지의 20% 지분을 넘겨주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나는 속으로 환호를 질렀다.


"야호! 됐어!"


해결의 실마리가 풀린 것이다. 나는 의뢰인에게 그 사실을 즉시 말하지 않았다.


"회장님! 만약 저쪽에서 마음을 바꿔 일부라도 양보를 해주면, 어느 정도 받고 싶습니까?"


"원래 그 땅은 내 돈으로 산 거니까 전부 받아야 하지만, 땅 살 때 나중에 나눠 쓰자고 했으니 절반 50%를 받아야지!" 50% 지분을 받는 것도 큰 양보라고 했다.


"회장님! 절반을 받겠다는 건 재판에서 완전히 승소한 거나 다름없어요. 그러니 이거보다는 양보하셔야 일이 잘 풀릴 거 같습니다."


설득을 통해 30%만 받겠다는 데까지 낮아졌다. 그 직후 나는 법원에 조정기일 신청을 하였다. 피고는 20%를 주겠다고 하고, 우리 측은 30%를 달라고 하니, 판사님은 서로 양보하여 25%로 하라고 권유하였다. 그렇게 조정이 성립되었다.


그런데 의뢰인은 조정조서를 받은 후에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땅으로 지분을 이전받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지금 땅을 이전받아도 자기가 곧 세상을 떠나면 그 땅은 자식들에게 상속될 것이라고 했다. 본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친구와 마음고생 하면서 재판을 했던 보람도 없다고 했다. 그래서 현금으로 돌려받기를 원했다. 결국 25% 지분을 현금으로 환산한 액수를 피고로부터 받기로 했다. 피고 측에서도 흔쾌히 응해주었다. 그리하여 의뢰인은 수억원의 현금을 수령하였다. 피고 대리인 변호사 사무실에 가서 고액의 수표 여러 장을 받아왔다. 의뢰인은 나의 공로를 인정하고 흔쾌히 적잖은 성공보수를 지급하였다.


나는 성공보수를 받게 되면 볼리비아에서 선교 활동을 하는 친구에게 1000만원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친구는 남대문시장에서 구입한 아동복을 볼리비아로 수출하면서 어렵게 생활하고 있었다. 아동복 구입자금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그 자금을 주고 싶었다. 예정대로 많은 성공보수로 받은 나는 수표를 지갑에 넣고 퇴근을 했다. 큰돈을 수중에 갖고 있다 보니 운전대에 힘이 들어갔다.


퇴근하여 집에 가까이 올수록 친구에게 주려던 돈이 자꾸 떠올랐다. "1000만원이나 되는 큰돈을 주기에는 너무 많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 돈을 주겠다고 말한 적도 없었고, 그냥 나 혼자 생각뿐이었기에 꼭 그 액수가 아니라도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아니었다. 500만원을 줘도 충분할 거 같았다.


"그래, 500만원 보내주자!"


그렇게 금액을 낮추자 마음이 상당히 가벼워졌다. 한순간에 500만원을 번 느낌이었다. 그리고서 퇴근 시간 정체된 도로 위에 있다 보니 다시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야! 100만원도 적은 돈은 아니다. 이거라도 내가 줄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어?"


주머니에는 큰 액수의 수표를 여러 장 갖고 있으면서도 친구에게 줄 돈은 계속 깎아내리고 있었다. 그러다가는 정말 한 푼도 주지 않고 내가 다 쓸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그 돈을 빨리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할 거 같았다. 그래서 그날 저녁 교회로 가서 헌금 담당자에게 전달하여 그 친구에게 송금하라고 부탁하기로 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교회로 갔다. 그런데 교회 출입구에 볼리비아에 있던 그 친구가 있었다. 그날 오후에 귀국했다고 했다. 마치 그 1000만원을 받으려고 온 것 같았다.


원문 및 출처(발췌) : https://news.lawtalk.co.kr/columns/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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