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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과 영어로 글쓰기에 관한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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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재원 댓글 0건 조회 2,590회 작성일 06-10-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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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한겨레 신문에 "은근한 결론으로 설득하라"라는 안광복 선생님(중동고 철학교사)님의
논술에 관한 글이 올라왔길래 그를 예문으로 해서 우리나라의 잘못된 논술교육에
대해서 글을 써 봅니다. 아무리 어휘를 많이 알고, 고급 영문법을 많이 알아도,
글을 쓰면 콩글리쉬가 되어버리는 이유는 바로 한글의 애매한 어법을 그대로 영어로
옮겨버리기 때문입니다. 한국 영자신문이 미국인이 보기에 이상한 이유이기도 하구요.

기본적으로 고전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기인한 고대 논리학 등이 제대로 보존된
것은 오히려 미국입니다. 영국의 문화를 그대로 들여오지 못하고, 도서관 등을 통해서
세익스피어 등의 고전을 통해 영국과 유럽문화를 받아들인 미국이 "I guess"와 같은
고어를 더 많이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구요. 영국은 "I suppose"라고 하는 말을
더 많이 쓰는대, 세익스피어를 통해 영국문화를 배우니까 고여를 평상어로 쓰게 되었던
거죠.

그럼, 한글을 논리적으로 쓰는 것은 영어하곤 다르지 않느냐는 생각을 가지시는 분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죄송하게도 전혀 그렇진 않습니다. 한국에 들어와있는 논리학
책은 아리스토텔레스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체계화된 서양의 철학중 논리적 진실을
추구하는 체계로, 일본의 번역을 거쳐, 한국에 들어와 있습니다. 일본의 번역이 엉터리
이기 때문에 이상한 형태로 들어와 있기 때문에 일본어와 한글이 애매한 언어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논리에 대해서 얼마나 잘못 알고 있는가 하면, "당신 논리는 당신 생각이고,
내 생각, 내 논리가 있다는" 이상한 얘기에서 가장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논리적,
합리적이란 것은 정해져 있는 것이지 이 사람 것과 저 사람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논리(logic)를 사고방식이라고 엉터리로 번역해 버리니까 발생하는 문제죠. 연역법
이든, 귀납법이든, 논리모순이라든지 하는 것은 모두 서양 논리학의 추론 방법입니다.

따라서 논리학에 맞지 않는 주장을 하는 것은 자기 나름의 논리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비합리적인 것이고, 주관적인 것이고, 소위 미국 선교사가 한글은 악마의 언어라고
하면서 도무지 설득을 할 수 없는 언어이다라고 했다는 것의 이유가 됩니다. 참고로
미국 역시 고등학교 졸업을 하지 못하거나(통상 졸업률이 50%미만), 대학 졸업을 하지
않으면 잘 모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미국 사람들도 논리학을 따로 배우기보단, 일상의 수업을 통해서 발표나, 토론을
하면서 스스로 터득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관련된 내용이 전혀
소개가 되지 않거나, 일본식으로 엉뚱하게 소개가 되어 있기 때문에 유명한 논술교사나
심지어 논술문제를 내는 사람조차 모르는 것이 일상입니다. 다만, 유럽이나 미국의
유학생활을 오래한 경우에는 스스로 자연스럽게 체득되어서 논리적으로 말할 수가 있지만
스스로도 왜 자기가 그렇게 얘기하고 다른 사람들은 논리적일 수 없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유를 알고 배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살다보니 그렇게 변했을 뿐.

우리나라에도 PSAT라고 해도 소위 고시라고 하는 고급공무원 선출시험에서 영어문장을
번역해서 논리추론 문제를 내고는 있지만, 어느 수험교재에도 제대로 된 설명은 없습
니다. 문제를 많이 풀어서 유형을 외워서 푼다는 우리의 전형적인 수험요령만 전수되고
있는 형편이지요.

유럽/남미의 글쓰기 스타일은 통상 길게 쓰는 것이 글을 잘 쓰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습
니다. 심지어 남미는 한페이지를 한 문장으로 쓸 수 있는 능력이 글을 잘 쓰는 능력이라
고 정의되구요. 유럽의 경우에는 이유나 근거제시가 매우 짧습니다. 하나의 이유만 있다면
무조건 옳다고 글을 쓰게 됩니다. 학설이 발달하고 코멘타르가 발달하는 이유입니다.
반면에 철학적 논리적 진실에 철저한, 오히려 고전적인 논리학에 철저한 미국의 영어의
경우에는 짧은 글, 쉬운 단어로 쓴 글,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는 여러가지 이유들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결론이 옳으냐 그르냐보단, 그 이유가 옳으냐 그르냐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것이죠.

유럽/남미의 글쓰기가 그럴듯한 주장을 많이 늘어놓을 수 있느냐에 초점이 있다면, 미국식
글쓰기는 실제로 그 이유들이 합당한지 여러차례 재점검을 하는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
니다. 하나의 주장이 있으면 그 결론이 무조건 옳다고 고집하는 대륙법 문화가 다양한
이유를 가지고 그 하나 하나를 공격/방어하면서 서로 협상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이 만들어
지는 문화에 취약점을 가지게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영미계 로펌이 대륙법계 국가의
로펌시장에 상대적 우위를 점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구요. 개방성의 차이라고 할까요?

안광복 선생님의 예제를 인용해서 왜 잘못된 설명인지 실전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영어로
그대로 옮겨도 콩글리쉬가 되지 않도록 말이죠.

첫째, "엘리트들은 스마트 청바지를 입습니다."가 암시하는 결론을 찾으라고 합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168074.html
(안광복 선생님, "은근한 결론으로 설득하라," 한겨레 신문, 10/29/2006) 그는 이유와
근거만 제시하고 결론은 내리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문단이 한 사고의 단위라는 작문의
기초에도 어긋나는 글 작성방법입니다.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라면 상대방을
설득하는 글을 이렇게 쓰면 절대로 안됩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엘리트가 되려면 스마트 청바지를 입어라"가 정답이 될 듯 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문학적 표현이 되거나, 시적 표현, 소위 CF같은 상상의 표현이 될 수는
있겠지만, 논술에서 이렇게 쓴다면 완전히 주관적인 비합리적인 글이 되어 버립니다.

철수는 사각 바지를 입습니다.
사각 바지를 입으면 천재가 됩니다.
철수는 천재가 됩니다.

라고 하면 완벽한 삼단논법의 귀납법이 됩니다. 여기에서 두번째 문장이나 첫번째 문장중
하나를 없애고 그것이 무엇인지 찾으라면 추측을 찾는 것이고, 영어시험에선 assumed된
내용을 찾는 것이 되며 없어서 논리적인 글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결론을 안써도
암시될 수 있다는 생각은 시적, 문학적으로 훌륭한 창작이 될 수 있지만, 객관적인 논술
이 될 수는 없습니다.

흔히 논술의 모범답안으로 소개되는 글에는 어김없이 우화나 고전속의 사자성어 혹은 속담
의 인용이 보입니다. 그러나 객관적인 글이나 설득을 위한 글, 그러니까 설명문이나 논설
문의 경우에는 가능하면 이러한 비유는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감정적으로 혹은
주관적으로는 해당 우화가 논술의 주제와 비슷한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 이렇게 일치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관적 인상평가로 비슷해 보일 뿐인
것입니다. 이렇게 잘못되거나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 비유를 인용할 경우에는 유사비교
모순에 해당합니다. 비슷하지도 않는데 비슷하다고 혼자 생각하는 것일 뿐이란 얘기죠.

논술은 감동을 주기위해 글을 쓰는 문학적인 글도 아니고, 어려운 고전속 에피소드나
사자성어를 인용해 글의 품위를 높이는 등으로 쓰는 글도 아닙니다. 상대를 설득하는 것은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라 논리에 맞게 합리적인 주장을 하므로써 상대가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객관적이어야 하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바로 영어로 옮긴다고 해도
콩글리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서양의 논리학을 쓰면서, 연역법, 귀납법의 정의를 일본식/한국식으로 내리면서 이상하게
글을 쓰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진실에는 실체적 진실, 형식적 진실, 그리고 논리적 진실로 나뉘게 됩니다. 통상 미국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사고하여 내린 결론에 집착하게 되는데 이 역시 법률적 진실 앞에선
주관적인 것이 됩니다. 논리적으로 A가 범인이라고 해도 증거가 없다면 그가 범인으로
처벌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한국이나 일본의 주관적인 것이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냥 주관적으로 A가 범인일 것 같다는 쪽에 가깝습니다. 물론 자기 나름의 이유는
있습니다. 범인형으로 생겼다거나, 과거에 전과가 있다거나 하는 것이죠. 그러나 이것은
법률적인 근거가 될 수도 없고, 논리적인 근거도 될 수가 없습니다. 그냥 느낌, 소위
인상평가에 의한 주관이죠.

기독교 사회인 서양에선 실체적 진실은 신 밖에 모르는 것이고, 동양에선 부처밖에 모르
는 것이죠. 인간이 실체적 진실을 밝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다신교적 사회에서
나 가능한 생각이니까요. 따라서 서양은 철학의 세계에선 논리적 진실을 신학의 영역밖에선
최고의 진실로 인정하고, 법학의 세계에선 논리적 진실을 넘어서 증거우위의 법칙 혹은,
합리적인 의심을 넘어서라는 원칙으로 진실을 추구하게 됩니다.

반면에 일본이나 한국은 권위를 가진 사람의 얘기가 진실이 되고, 권위가 없으면 그 사람의
말이 맞는 얘기이든 아니든 신뢰를 얻지 못합니다. 또한 독립법원인 법관은 소송절차에
의한 시간낭비 등은 개념치 않고, 당사자나 변호사들의 끊임없는 공방을 허용함으로써 공판
중심주의의 단점을 누증시켜서, 다시 말하면 당사자들의 속마음을 다 털어놓게 허용을 하는
등 절차의 위반 정도는 실체적 진실을 밝히자는 원칙에 의해 무시되기도 하는 것이죠.

물론 재판이 끝나도 어느 당사자도 만족을 못하고 불만을 터트리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구요.
자신이 이기지 못하면 무조건 법원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법률적인 이유가 아니라
자기 생각에 상대방이 무조건 더 잘못했다는 생각이 앞서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하구요.

우리 교육제도에서 빠져있는게 있다면 빨리 제도를 도입하고, 장단점을 비교해서 한국화를
하면 됩니다. 분명 동양의 통합적인 문화와 서양의 듀얼리즘, 분리적인 문화는 일장일단이
있으며 서로 조화될 때에 비로서 문명간의 대화가 가능할 테니까요. 논술을 학원에서 1-2년
안에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고, 학교에서 가르치지도 않는데 대학 입시에서
평가를 하겠다고 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학교에서 토론과 발표/ 그리고 글쓰기 수업이
이루어지도록 교육제도를 바꾸고, 그 학생들이 유치원에서 고등학교를 거칠 때까지 기다린
다음에 평가를 한다고 하면 또 모르겠지만요.

객관적인 기준이 없이 채점자의 주관을 학생들에게 주입시킬 생각이라면 일찍 제도를 없애
버리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창의적인 글쓰기나 학문의 발전을 위해 전혀 도움
이 되지 않는 제도이니까요. 참고로 프랑스이 논술은 위원들이 모범답안을 작성하고, 해당
내용마다 객관적인 점수를 부여해서 선생님마다 다른 채점결과가 나오지 않도록 한다는 데에서
채점자 마음대로 채점하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제도입니다. 미국의 새로운 SAT에 첨부되는
에세이는 명문대의 경우 지나치게 주관적이란 이유로 점수로 참고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논술학원의 상업성을 위해서 더이상 글쓰기교육이 왜곡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차라리 시나 소설 등 문학작품을 쓰게 하거나, 전공에 따라서 자유롭게 적성이나 학습계획
등을 작성하게 하는 자기소개서가 훨씬 수험자의 특성을 잘 반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프랑스식도 아니고, 미국식도 아니고 그냥 출제위원들의 상식에 따른 문제출제는 엉터리
투성이의 한국화의 또다른 실패작일 뿐이라 생각합니다.

최재원 올림.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11-02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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