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사랑합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인생의 스승을 향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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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재원 댓글 0건 조회 2,258회 작성일 06-08-23 00:00본문
안녕하세요!
어느 후배의 답장을 쓰다가 글이 길어져서 게시판에도 중복게재 합니다.
사적인 내용은 제외하는 점을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복학준비에 바쁠텐데 답장까지 주고 고마워요. 미국에서도 1년이나 있었
으면 아마 JD 1학년 수업을 바로 들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거에요. 어차피
50%이상 들리면 수업 따라가는데는 지장이 없거든요. 저도 인제 2년이 찼
는데 겨우 80-90% 들릴까 말까 해요. 듣기는 많이 늘었지만 여전히 말하기
쓰기는 외국언어로 해 본적이 드물다 보니 쉽게 늘지가 않네요. 하긴 보통
5년에서 길게는 10년이 걸린다고 하더군요.
수십년 산 미국 교포는 말하기, 쓰기는 극복하기 힘든 일이기도 하지요.
욕심내기 보다는 차근차근하게 하나씩 준비해 가세요. 언제 가느냐 하는
시간 문제는 절대로 중요한게 아니에요. 스스로 확신에 차서 일을 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겠지요.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후회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겠지만, 전 절대로 후회같은 것은 안해요. 왜냐하면 그런 시간이 있었
으니까 시행착오 끝에 이렇게 자신감 있는 나 자신이 될 수 있지 않느냐
는 거죠.
(중략)
반대로 저는 대학원을 다닐때 평화 세미나 원고를 준비하면서 조영식
학원장님의 전기나 각종 평전을 읽은 적이 있어요. 일제시절 학군
에 끌려가다 탈출하신 것부터 해서, 68년 세계총장회의를 개최한
것, 그리고 70-80년대에 UN에 직접 청원을 해서 UN 세계 평화의
날과 UN평화상의 제정을 이루어 내신 분이시죠. 이들의 제정을
하는 날 UN회의를 방청하면서 품에는 칼을 가지고 계셨데요.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결해서라도 UN이 평화에 관심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죠.
아마 전 학원장 님 본인의 일제시절 학군에 끌려가고 탈출하는
과정에서 겪은 경험 등이 여기에 영향을 미쳤겠지요. 또한 5.16
군사쿠데타 당시에 한자리를 해 달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제안을
거부하여 옥고를 경험하시기도 하셨죠.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어떠한 의견도 받아들이겠다고 해서 학원장님이 제안하신게 바로
새마을 운동의 시초가 되었어요. 노천극장에서 보이는 탑의 의미
를 그제야 알았죠.
학생들은 흔히 모든 책임을 학원장님께 돌리고, 뜬 소문으로
스테레오 타입으로 자신의 주관을 객관화 시켜가게 되는데,
대표적인게 한의약 사태때의 일이죠. 약대와 한의대 모두 반발
하고, 보건복지부 및 교육부는 강경하게 학생들의 퇴학 등의
조치를 요구했어요. 요즘 잘 나가는 모 대학의 총장님은 재벌
에게 잘못했다고 퇴학까지 운운하고, 얼마전엔 실제로 퇴학된
사례도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 학원장님은 과감히 총장 사퇴서를 제출하시고,
대신에 학의대 학생들의 퇴학을 막으셨어요. 이것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회의 반대면이란 것이죠. 창업자의 마음은 창
업자만이 알고, 아버지의 마음은 아버지만이 아는 것이죠.
제자의, 그리고 자식의 장래를 위해 자신이 욕을 먹어도 어머
니와 같은 사랑으로 자식을 망치기 보다는 자식이 나중에
그것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그 마음말이에요. 철이 든다고 할까
자식은 언제가 아버지의 뒷모습에서 눈물을 발견하지요.
저처럼 가정이 좀더 힘들었던 경험이 있다면 그리고 아버지가
어머니의 사랑을 보인 적이 있다면 아마 아버지의 눈물을
눈앞에서 바로 목격을 하게 되는 충격을 받을 때가 있을 것입
니다. 그때야 비로서 자식이 조금 성장을 하고, 그리고 자식이
다시 아버지가 되고 부모가 되어, 귀엽기만 한줄 알았던 자식의
밤새 우는 울음과 1년에 한번 갈아줘도 안갈아줄 수 없는 기저
귀와 정말 마른자리 골라서 앉쳐주는 그 고생 아닌 고생을 해
본 연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죠. 늦게 말이죠.
그러나 부모는 자식의 맑은 눈망울, 하루에 한번 만이라도 방긋
웃어주는 얼굴에서 자신이 죽은 후에도 자식이 잘 살아갈 것을
확인이라도 하듯 가슴속에서 행복을 느끼게 되죠. 그러나 자식이
어느덧 미운 일곱살(요즘은 미운 다섯살이라고 아니면 더 내려
가나요)이 되고 나면 아버지는 더이상 웃어주지 않는 그리고
심지어 "되었어요. 그만"이라는 자식의 모진 소리를 들어야 하게
되면 가슴속의 사랑의 문을 닫고 이젠 자식이 자기의 사랑을
받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를 향해서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에 자기 가슴을 매어지게 하는 야단도
치게 되는 것이죠.
부모나 자식을 잃고 나면 우리가 그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아는 것은 인간의 일반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인간이고, 실험
결과가 없이는 믿지 않는 것이 현대의 우리들 젊은 세대들입니다.
아무리 창업자, 혹은 아버지가 엄한 애정으로 자식을 대할 지라도
우리가 진심으로 가슴을 열고 아버지는 원래 그래, 창업자는 원래
그렇게 엄한 애정을 보이셔야 하는거야 라고 믿고 그의 좋은 뜻을
살리고 나의 개성도 함께 살린다면 우리 경희의 멋진 후배들, 그리고
우리 아버지들의 멋진 자식들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저도 여러분을 잘 이해합니다. 저희 가정에 경제적으로 어려
운 일이 생겼을 때 제 눈앞에서 쓰러져 가는 아버지의 모습과 눈물을
보이시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저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세상
에서 제일 강하다고 생각하신 분이었는데, 그렇게도 존경하는 분이셨
는데 이렇게 힘없이 쓰러져 죽음에서 헤매고 계시는 모습이 너무도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이 지나고 어느듯 인간의 망각이 작용할 즈음에는 그런
저 자신도 아버지에게 반발을 하고, 제 길이 더 옳은 길이라고 가슴에
못을 박는 말도 하게 되곤 합니다. 그러나 저는 믿습니다. 우리의
아버지 그리고 창업자들 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
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들의 뜻을 알아주길 기다리고
계신 것 뿐입니다. 저도 우리 애기에겐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제가 대학교를 다닐 무렵 사진으로만 뵙던 학원장님을 체육대학의
강당에서 유옥렬이란 체조선수를 격려하기 위해서 오셨던 길에
먼 발치에서 뵈었던 적이 있습니다. 너무나 강한 분으로 알고 있었
는데 어느새 백발이 새하얗게 앉으신 너무나 자애로우신 분이 거기
에 계셨습니다.
제가 잠시동안 연구조교를 했던 윤명선 전 학장님은 제겐 너무나 대하기
힘든 분이셨습니다. 근엄하시고 늘 엄한 아버지의 모습이셨으니까요.
감히 인사도 드리기 힘들었었는데, 어느날 조교들이랑 식사를 하는데,
어느 한 조교가 학장님의 첫사랑에 대해서 묻는 것이었어요. 저는 화들
짝 놀랬고,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학장님은 제가 상상했던 그런 분이 아니셨죠. 제가 그렇게 잘못 생각
하고 있었던 것 뿐이라는 것이죠.
연구조교는 두분의 교수님을 모시고 있었는데, 당시 행정대학원장님이
시던 김병묵 총장님은 거의 뵙지도 못할 만큼 제대로 된 역할을 못했
었어요. 행정대학원 스탭들이 많아서 편지만 가끔 전달했을 뿐이어서
늘 엄한 모습만 뵙지 않았나 싶어요. 그렇지만 짧은 실력으로 제가 평화
세미나를 위해 작성한 에세이집을 받으시고도 바쁜 시간을 내주셔서
격려를 해 주시던 모습은 아직도 잊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언제나 자상하게 받아주시는, 때론 엄한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케
하기도 하시지만, 따뜻한 아버지의 정을 듬뿍 그렇지만 때론 엄하게
절제해서 가르쳐 주시는 우리들의 아버지의 모습, 그리고 제가 닮아가고
있는 그런 부모되는 모습, 스승이 되는 모습을 가르쳐 주신 분이시죠.
저는 헌법만을 배우지 않았으며, 인생을 수업료도 내지 않고 배웠죠.
그러나 때론 엄한 모습에 그 가슴속의 사랑을 느끼지 못했던 적도 없지
않았던 것은 저 역시 자식의, 그리고 제자 아닌 학생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죠.
저는 한국을 떠나오던 2년전에 아버지께 처음으로 "사랑합니다" 하면서
생애 처음으로 포옹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접해 보지 못했지만,
우리 경희의 창업자이신 학원장님, 그리고 우리 법대를 멋지게 지켜주신
윤명선 전 학장님께 이제는 "사랑합니다"라는 말로 존경을 대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엄한 애정을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해 항상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우리 멋진 경희 후배 여러분들!
이젠 교수님들께 단지 법학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스승으로서
삶을 그분들의 뒷모습에서 배울 수 있는 덤을 얻어보자구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글이 여기저기로 흘러서 죄송해요!) 이처럼 우리가
보는 것만이 혹은 듣는 것만이 사회의 진실은 아니라는 것이에요. 단지
우리의 시각으로, 우리의 가치관, 세계관, 소위 패러다임이란 것으로
진실을 우리 마음대로 해석하고 있을 뿐이지요.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해요. 그런데 그 실수를 잡아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비난해 버린다면, 이 세상은 오로지 권위와 권력으로 자기의 실수를
감출 수 있는 부패세력들만의 것이 되어 버리죠. 그리고 실수도 그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실은 대안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거죠. 따라서 대안
없는 비판만큼 나쁜 것이 없는 것이구요.
야당은, 혹은 진보단체는 비판을 하는게 목적이라고 하는 이상한
논리까지 나오는 세상이더군요. 매우 주관적인 해석이죠. 원래
비판을 하는 것은 상대방을 사랑하고, 상대방이 완성되게 하기
위해서 걱정을 해서 대안을 제시해 주는 것인데 본말의 전도죠.
상대방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사람같고, 자기만이 옳고, 그래서
비판만 하면 세상이 좋아진다는 생각인데 도대체 뭘 위해서 사는
건지 모르게 되어 버린거죠.
결국 인간은 누구나 평화, 비폭력, 그리고 사랑을 받기를 원하는데
그런 사회를 만들겠다고 하면서 자기는 폭력, 비평화, 그리고 사랑
은 커녕 증오를 보내야 하느냐는 거죠. 목적이 평화이면, 행복이면
수단도 당연히 평화여야 하고 행복이어야 하죠. 이상주의라고 비판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상주의인 것은 본인이 실천을 안하기 때문
이지 실현 불가능 하기 때문이 아니란 것을 알아야 겠지요.
그래요 아무도 이상주의에 대해서 실천을 안하려고 해요. 왜냐하면
고생 혹은 자신의 희생이 필요하거든요. 인간은 누구나 자기애,
나르시시즘이 있어서 자기에겐 너그롭고, 남에겐 덜 너그로운 법이
거든요. 그러니 자기는 천사고 남은 악마이므로 악마를 없애는게
평화를 가장 빨리 앞당기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수단의 정의, 부정의
는 무시하고 목적이 옳으니까 다 좋은거야 라고 밀어붙이는 것이죠.
그렇지만 시계는 다시 거꾸로 돌아가 버리죠. 내가 그 지위에 가면
달라져야 하는데, 그를 닮아버리게 되거든요.
즉, 그 지위가 그 사람을 대안을 모르게 하고 실수를 하게 만드는
것이지, 그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었다는 것이죠. 그 지위에 가도
그 지위의 행복감에 도취되지 않고, 평생을 정진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도록 평소에 자신을 개혁해야 하는데 보통 사람들은 그걸
게을리하죠.
제 생각은 남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 하지 못한다고 비난하기 보단,
제 스스로가 이상주의를 실천해서 평천하하고, 치국하고, 제가해서,
죽을때까지 수신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후배님 이것 아세요? 원래는
평천하/치국/제가/수신인데, 일본애들이 자기 맘대로 순서를 바꿔서
한국과 대만의 교과서들은 중국 원전과는 달리 일본식으로 이것을
쓰고 가르친다는 사실을요.
왜냐하면 수신이 가장 어렵고(남들 속이기는 쉬워도 자기 자신은
못 속이잖아요), 제가가 참 힘들기 때문에(자기 가족도 못 속이죠),
백성들이 나라일, 천하를 다스리는 일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문화정치의 일환이라는 것을요.
음모론. 세상에 음모론으로 가면 하나도 되는게 없어요. 실은 문화
정치의 음모가 아니가, 자기들도 몰랐던 것이지요. 중국에서 한국
보다 더 멀리 떨어진 나라에 두번을 걸쳐 번역이 이루어지는데
어떻게 원전의 지식이 전달이 되겠어요. 이렇게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에도 미국의 소식 하나도 한국에 제대로 전달이 안되는 걸요.
제가 인생을 조금 더 살아본 결과는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다는
거에요. 다만, 자기 경험의 범위가 좁고, 자기 딴에는 자기가 아는
것만이 최고의 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의견이 달라
보이고, 정치공학적으로 이겨야 하니까 나쁜 짓을 하게 되는 거에요.
우리가 그 사람에게 어머니처럼 다가가서 대안을 제시해 줄 수 있다면
그도 마음을 열고 의견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죠.
사춘기의 청년이 아버지에게 반항은 하지만, 속 마음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것이 아버지라도 남들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아버
지가 스스로 수신, 제가에 열심이신 것을 그리고 때때로 자신을 사랑
하신다는 것을 마음으로 느끼기 때문이죠. 개혁은 이렇게 가야 하는
것이죠. 시간이 중요한게 아니에요. 부모자식 간에도 화해를 하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하물려 수십년간 떨어져 있고, 수백
수천년을 떨어져 살아온 세계의 각 국가들이 화해를 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어요.
절대 평화주의를 이상주의라고 하고, 하루라도 불쌍한 민중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투쟁이나 폭력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을 된다
고 믿게 가르치고, 자신의 수신을 멈춰버린 사람만의 자기합리화라는
것이죠.
간디의 예를 보죠. 그가 비폭력 선언을 한게 1906년 9월 11일인데,
올해가 100주년이 되는 해에요. 그가 비록 암살을 당했지만, 오늘날의
인도를 그는 수십년만에 보게 된 것이죠. 내가 죽기 전에 개혁을 다
해야 한다는 생각이 불가능한 것이지, 절대평화주의를 실천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해요. 내가 못하면 내 자식이 아니
내 후배가 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개혁의 레일을 깔아야 해요.
세종대왕은 바로 나올 수가 없어요. 태종대왕이 있어야 하죠. 태종
대왕이 훈신들을 모두 처벌하고, 세종의 왕비의 가문도 모두 역적으로
몰아 없애버렸기 때문에 세종이 외척이나 간신, 훈신들의 압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거에요. 그런데 우리가 세종만 칭찬하고 태종은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비난한다면, 세상에 아비없는 자식이 있다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거든요.
그래요. 오늘은 제가 글이 너무 길어졌네요. 남은 방학 잘 보내고,
새학기부턴 또 멋지게 학생생활을 해 보자구요. 가문의 대를 이어가는
개혁의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면 되는 것이지, 내가 다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깐 일단 영어의 기초부터 다지고, 우리의 자식 세대는 영어
때문에 그리고 고시 때문에 고생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시스템 개혁의
단초를, 비전을 마련하는게 우리의 사명이 아닐까요?
그럼, 건강 유념하시고 다음에 또 뵙지요.
최재원 올림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11-02 15:20)
어느 후배의 답장을 쓰다가 글이 길어져서 게시판에도 중복게재 합니다.
사적인 내용은 제외하는 점을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복학준비에 바쁠텐데 답장까지 주고 고마워요. 미국에서도 1년이나 있었
으면 아마 JD 1학년 수업을 바로 들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거에요. 어차피
50%이상 들리면 수업 따라가는데는 지장이 없거든요. 저도 인제 2년이 찼
는데 겨우 80-90% 들릴까 말까 해요. 듣기는 많이 늘었지만 여전히 말하기
쓰기는 외국언어로 해 본적이 드물다 보니 쉽게 늘지가 않네요. 하긴 보통
5년에서 길게는 10년이 걸린다고 하더군요.
수십년 산 미국 교포는 말하기, 쓰기는 극복하기 힘든 일이기도 하지요.
욕심내기 보다는 차근차근하게 하나씩 준비해 가세요. 언제 가느냐 하는
시간 문제는 절대로 중요한게 아니에요. 스스로 확신에 차서 일을 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겠지요.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후회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겠지만, 전 절대로 후회같은 것은 안해요. 왜냐하면 그런 시간이 있었
으니까 시행착오 끝에 이렇게 자신감 있는 나 자신이 될 수 있지 않느냐
는 거죠.
(중략)
반대로 저는 대학원을 다닐때 평화 세미나 원고를 준비하면서 조영식
학원장님의 전기나 각종 평전을 읽은 적이 있어요. 일제시절 학군
에 끌려가다 탈출하신 것부터 해서, 68년 세계총장회의를 개최한
것, 그리고 70-80년대에 UN에 직접 청원을 해서 UN 세계 평화의
날과 UN평화상의 제정을 이루어 내신 분이시죠. 이들의 제정을
하는 날 UN회의를 방청하면서 품에는 칼을 가지고 계셨데요.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결해서라도 UN이 평화에 관심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죠.
아마 전 학원장 님 본인의 일제시절 학군에 끌려가고 탈출하는
과정에서 겪은 경험 등이 여기에 영향을 미쳤겠지요. 또한 5.16
군사쿠데타 당시에 한자리를 해 달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제안을
거부하여 옥고를 경험하시기도 하셨죠.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어떠한 의견도 받아들이겠다고 해서 학원장님이 제안하신게 바로
새마을 운동의 시초가 되었어요. 노천극장에서 보이는 탑의 의미
를 그제야 알았죠.
학생들은 흔히 모든 책임을 학원장님께 돌리고, 뜬 소문으로
스테레오 타입으로 자신의 주관을 객관화 시켜가게 되는데,
대표적인게 한의약 사태때의 일이죠. 약대와 한의대 모두 반발
하고, 보건복지부 및 교육부는 강경하게 학생들의 퇴학 등의
조치를 요구했어요. 요즘 잘 나가는 모 대학의 총장님은 재벌
에게 잘못했다고 퇴학까지 운운하고, 얼마전엔 실제로 퇴학된
사례도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 학원장님은 과감히 총장 사퇴서를 제출하시고,
대신에 학의대 학생들의 퇴학을 막으셨어요. 이것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회의 반대면이란 것이죠. 창업자의 마음은 창
업자만이 알고, 아버지의 마음은 아버지만이 아는 것이죠.
제자의, 그리고 자식의 장래를 위해 자신이 욕을 먹어도 어머
니와 같은 사랑으로 자식을 망치기 보다는 자식이 나중에
그것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그 마음말이에요. 철이 든다고 할까
자식은 언제가 아버지의 뒷모습에서 눈물을 발견하지요.
저처럼 가정이 좀더 힘들었던 경험이 있다면 그리고 아버지가
어머니의 사랑을 보인 적이 있다면 아마 아버지의 눈물을
눈앞에서 바로 목격을 하게 되는 충격을 받을 때가 있을 것입
니다. 그때야 비로서 자식이 조금 성장을 하고, 그리고 자식이
다시 아버지가 되고 부모가 되어, 귀엽기만 한줄 알았던 자식의
밤새 우는 울음과 1년에 한번 갈아줘도 안갈아줄 수 없는 기저
귀와 정말 마른자리 골라서 앉쳐주는 그 고생 아닌 고생을 해
본 연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죠. 늦게 말이죠.
그러나 부모는 자식의 맑은 눈망울, 하루에 한번 만이라도 방긋
웃어주는 얼굴에서 자신이 죽은 후에도 자식이 잘 살아갈 것을
확인이라도 하듯 가슴속에서 행복을 느끼게 되죠. 그러나 자식이
어느덧 미운 일곱살(요즘은 미운 다섯살이라고 아니면 더 내려
가나요)이 되고 나면 아버지는 더이상 웃어주지 않는 그리고
심지어 "되었어요. 그만"이라는 자식의 모진 소리를 들어야 하게
되면 가슴속의 사랑의 문을 닫고 이젠 자식이 자기의 사랑을
받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를 향해서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에 자기 가슴을 매어지게 하는 야단도
치게 되는 것이죠.
부모나 자식을 잃고 나면 우리가 그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아는 것은 인간의 일반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인간이고, 실험
결과가 없이는 믿지 않는 것이 현대의 우리들 젊은 세대들입니다.
아무리 창업자, 혹은 아버지가 엄한 애정으로 자식을 대할 지라도
우리가 진심으로 가슴을 열고 아버지는 원래 그래, 창업자는 원래
그렇게 엄한 애정을 보이셔야 하는거야 라고 믿고 그의 좋은 뜻을
살리고 나의 개성도 함께 살린다면 우리 경희의 멋진 후배들, 그리고
우리 아버지들의 멋진 자식들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저도 여러분을 잘 이해합니다. 저희 가정에 경제적으로 어려
운 일이 생겼을 때 제 눈앞에서 쓰러져 가는 아버지의 모습과 눈물을
보이시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저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세상
에서 제일 강하다고 생각하신 분이었는데, 그렇게도 존경하는 분이셨
는데 이렇게 힘없이 쓰러져 죽음에서 헤매고 계시는 모습이 너무도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이 지나고 어느듯 인간의 망각이 작용할 즈음에는 그런
저 자신도 아버지에게 반발을 하고, 제 길이 더 옳은 길이라고 가슴에
못을 박는 말도 하게 되곤 합니다. 그러나 저는 믿습니다. 우리의
아버지 그리고 창업자들 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
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들의 뜻을 알아주길 기다리고
계신 것 뿐입니다. 저도 우리 애기에겐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제가 대학교를 다닐 무렵 사진으로만 뵙던 학원장님을 체육대학의
강당에서 유옥렬이란 체조선수를 격려하기 위해서 오셨던 길에
먼 발치에서 뵈었던 적이 있습니다. 너무나 강한 분으로 알고 있었
는데 어느새 백발이 새하얗게 앉으신 너무나 자애로우신 분이 거기
에 계셨습니다.
제가 잠시동안 연구조교를 했던 윤명선 전 학장님은 제겐 너무나 대하기
힘든 분이셨습니다. 근엄하시고 늘 엄한 아버지의 모습이셨으니까요.
감히 인사도 드리기 힘들었었는데, 어느날 조교들이랑 식사를 하는데,
어느 한 조교가 학장님의 첫사랑에 대해서 묻는 것이었어요. 저는 화들
짝 놀랬고,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학장님은 제가 상상했던 그런 분이 아니셨죠. 제가 그렇게 잘못 생각
하고 있었던 것 뿐이라는 것이죠.
연구조교는 두분의 교수님을 모시고 있었는데, 당시 행정대학원장님이
시던 김병묵 총장님은 거의 뵙지도 못할 만큼 제대로 된 역할을 못했
었어요. 행정대학원 스탭들이 많아서 편지만 가끔 전달했을 뿐이어서
늘 엄한 모습만 뵙지 않았나 싶어요. 그렇지만 짧은 실력으로 제가 평화
세미나를 위해 작성한 에세이집을 받으시고도 바쁜 시간을 내주셔서
격려를 해 주시던 모습은 아직도 잊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언제나 자상하게 받아주시는, 때론 엄한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케
하기도 하시지만, 따뜻한 아버지의 정을 듬뿍 그렇지만 때론 엄하게
절제해서 가르쳐 주시는 우리들의 아버지의 모습, 그리고 제가 닮아가고
있는 그런 부모되는 모습, 스승이 되는 모습을 가르쳐 주신 분이시죠.
저는 헌법만을 배우지 않았으며, 인생을 수업료도 내지 않고 배웠죠.
그러나 때론 엄한 모습에 그 가슴속의 사랑을 느끼지 못했던 적도 없지
않았던 것은 저 역시 자식의, 그리고 제자 아닌 학생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죠.
저는 한국을 떠나오던 2년전에 아버지께 처음으로 "사랑합니다" 하면서
생애 처음으로 포옹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접해 보지 못했지만,
우리 경희의 창업자이신 학원장님, 그리고 우리 법대를 멋지게 지켜주신
윤명선 전 학장님께 이제는 "사랑합니다"라는 말로 존경을 대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엄한 애정을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해 항상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우리 멋진 경희 후배 여러분들!
이젠 교수님들께 단지 법학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스승으로서
삶을 그분들의 뒷모습에서 배울 수 있는 덤을 얻어보자구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글이 여기저기로 흘러서 죄송해요!) 이처럼 우리가
보는 것만이 혹은 듣는 것만이 사회의 진실은 아니라는 것이에요. 단지
우리의 시각으로, 우리의 가치관, 세계관, 소위 패러다임이란 것으로
진실을 우리 마음대로 해석하고 있을 뿐이지요.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해요. 그런데 그 실수를 잡아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비난해 버린다면, 이 세상은 오로지 권위와 권력으로 자기의 실수를
감출 수 있는 부패세력들만의 것이 되어 버리죠. 그리고 실수도 그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실은 대안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거죠. 따라서 대안
없는 비판만큼 나쁜 것이 없는 것이구요.
야당은, 혹은 진보단체는 비판을 하는게 목적이라고 하는 이상한
논리까지 나오는 세상이더군요. 매우 주관적인 해석이죠. 원래
비판을 하는 것은 상대방을 사랑하고, 상대방이 완성되게 하기
위해서 걱정을 해서 대안을 제시해 주는 것인데 본말의 전도죠.
상대방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사람같고, 자기만이 옳고, 그래서
비판만 하면 세상이 좋아진다는 생각인데 도대체 뭘 위해서 사는
건지 모르게 되어 버린거죠.
결국 인간은 누구나 평화, 비폭력, 그리고 사랑을 받기를 원하는데
그런 사회를 만들겠다고 하면서 자기는 폭력, 비평화, 그리고 사랑
은 커녕 증오를 보내야 하느냐는 거죠. 목적이 평화이면, 행복이면
수단도 당연히 평화여야 하고 행복이어야 하죠. 이상주의라고 비판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상주의인 것은 본인이 실천을 안하기 때문
이지 실현 불가능 하기 때문이 아니란 것을 알아야 겠지요.
그래요 아무도 이상주의에 대해서 실천을 안하려고 해요. 왜냐하면
고생 혹은 자신의 희생이 필요하거든요. 인간은 누구나 자기애,
나르시시즘이 있어서 자기에겐 너그롭고, 남에겐 덜 너그로운 법이
거든요. 그러니 자기는 천사고 남은 악마이므로 악마를 없애는게
평화를 가장 빨리 앞당기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수단의 정의, 부정의
는 무시하고 목적이 옳으니까 다 좋은거야 라고 밀어붙이는 것이죠.
그렇지만 시계는 다시 거꾸로 돌아가 버리죠. 내가 그 지위에 가면
달라져야 하는데, 그를 닮아버리게 되거든요.
즉, 그 지위가 그 사람을 대안을 모르게 하고 실수를 하게 만드는
것이지, 그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었다는 것이죠. 그 지위에 가도
그 지위의 행복감에 도취되지 않고, 평생을 정진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도록 평소에 자신을 개혁해야 하는데 보통 사람들은 그걸
게을리하죠.
제 생각은 남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 하지 못한다고 비난하기 보단,
제 스스로가 이상주의를 실천해서 평천하하고, 치국하고, 제가해서,
죽을때까지 수신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후배님 이것 아세요? 원래는
평천하/치국/제가/수신인데, 일본애들이 자기 맘대로 순서를 바꿔서
한국과 대만의 교과서들은 중국 원전과는 달리 일본식으로 이것을
쓰고 가르친다는 사실을요.
왜냐하면 수신이 가장 어렵고(남들 속이기는 쉬워도 자기 자신은
못 속이잖아요), 제가가 참 힘들기 때문에(자기 가족도 못 속이죠),
백성들이 나라일, 천하를 다스리는 일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문화정치의 일환이라는 것을요.
음모론. 세상에 음모론으로 가면 하나도 되는게 없어요. 실은 문화
정치의 음모가 아니가, 자기들도 몰랐던 것이지요. 중국에서 한국
보다 더 멀리 떨어진 나라에 두번을 걸쳐 번역이 이루어지는데
어떻게 원전의 지식이 전달이 되겠어요. 이렇게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에도 미국의 소식 하나도 한국에 제대로 전달이 안되는 걸요.
제가 인생을 조금 더 살아본 결과는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다는
거에요. 다만, 자기 경험의 범위가 좁고, 자기 딴에는 자기가 아는
것만이 최고의 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의견이 달라
보이고, 정치공학적으로 이겨야 하니까 나쁜 짓을 하게 되는 거에요.
우리가 그 사람에게 어머니처럼 다가가서 대안을 제시해 줄 수 있다면
그도 마음을 열고 의견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죠.
사춘기의 청년이 아버지에게 반항은 하지만, 속 마음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것이 아버지라도 남들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아버
지가 스스로 수신, 제가에 열심이신 것을 그리고 때때로 자신을 사랑
하신다는 것을 마음으로 느끼기 때문이죠. 개혁은 이렇게 가야 하는
것이죠. 시간이 중요한게 아니에요. 부모자식 간에도 화해를 하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하물려 수십년간 떨어져 있고, 수백
수천년을 떨어져 살아온 세계의 각 국가들이 화해를 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어요.
절대 평화주의를 이상주의라고 하고, 하루라도 불쌍한 민중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투쟁이나 폭력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을 된다
고 믿게 가르치고, 자신의 수신을 멈춰버린 사람만의 자기합리화라는
것이죠.
간디의 예를 보죠. 그가 비폭력 선언을 한게 1906년 9월 11일인데,
올해가 100주년이 되는 해에요. 그가 비록 암살을 당했지만, 오늘날의
인도를 그는 수십년만에 보게 된 것이죠. 내가 죽기 전에 개혁을 다
해야 한다는 생각이 불가능한 것이지, 절대평화주의를 실천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해요. 내가 못하면 내 자식이 아니
내 후배가 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개혁의 레일을 깔아야 해요.
세종대왕은 바로 나올 수가 없어요. 태종대왕이 있어야 하죠. 태종
대왕이 훈신들을 모두 처벌하고, 세종의 왕비의 가문도 모두 역적으로
몰아 없애버렸기 때문에 세종이 외척이나 간신, 훈신들의 압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거에요. 그런데 우리가 세종만 칭찬하고 태종은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비난한다면, 세상에 아비없는 자식이 있다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거든요.
그래요. 오늘은 제가 글이 너무 길어졌네요. 남은 방학 잘 보내고,
새학기부턴 또 멋지게 학생생활을 해 보자구요. 가문의 대를 이어가는
개혁의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면 되는 것이지, 내가 다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깐 일단 영어의 기초부터 다지고, 우리의 자식 세대는 영어
때문에 그리고 고시 때문에 고생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시스템 개혁의
단초를, 비전을 마련하는게 우리의 사명이 아닐까요?
그럼, 건강 유념하시고 다음에 또 뵙지요.
최재원 올림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11-02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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